▲ 지난 4월 4일 ‘윤석열퇴진 영암행동’ 주최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파면 영암군 군민대회’에서 파면 선고 소식에 기뻐하는 주민들의 모습

계엄의 그림자가 드리운 밤 (12.3~12.4)

밤 10시 20분, TV 화면에 갑자기 등장한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에 그 시간만큼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 여태껏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풍경이 어느새 정지화면처럼 멈춰 서 있었고 여기저기선 탄식과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미친놈, 미쳤구먼, 미쳤어” 손에 든 휴대폰으로 영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교차했다.

이튿날 12월 4일, 영암군청 앞에는 지역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만난 전교조 영암지회 박순기 지회장은 교육 현장의 혼란을 전했다. “학교는 아침부터 큰 혼란에 빠졌어요. 선생님들은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등교시켜야 할지 망설였죠. 결국 교실에서는 수업 대신 계엄령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엔 교육자로서의 책임감과 시민으로서의 분노가 동시에 느껴졌다.

▲ 지난해 12월 4일 영암군청 앞에서 영암민주단체협의회 주도로 열린 ‘헌정유린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구속 촉구 영암군민 긴급 시국대회’ 모습

여느 농촌의 일상과 마찬가지로 별다름이 없던 영암도 이날만큼은 달랐다.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권혁주 영암군농민회 사무국장은 전날 밤을 꼬박 새운 뒤에도 군청 앞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뽑았다고 이렇게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의 충혈된 눈에서는 피로보다 결연한 의지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안이숙 참교육학부모회 영암지회장의 이야기는 그날 밤 영암의 평범한 가정들이 겪은 충격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밤늦게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단체 채팅방에서 계엄령 소식이 들려왔어요. 너무 놀라 잠자는 남편을 깨웠죠. 아이들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깨어났는데, 중학생 아들은 ‘내일 학교 가야 해요?’라고 물었고, 초등학생 딸은 ‘계엄령이 뭐예요?’라고 물었어요” 그녀의 말에서 한 가정의 일상이 순식간에 불안으로 뒤덮인 순간이 그려졌다.



군민들의 첫 응답 (12.5~12.10)

계엄령 선포 이틀 후인 12월 5일, 영암군의회는 지역사회의 대표기관으로서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45년 만에 선포된 계엄령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닙니다. 이는 국회와 지방의회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시도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위법 행위입니다” 성명서는 5·18 민주정신을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 지난해 12월 5일 영암군의회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규탄하고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같은 시기, 지역시민사회는 보다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윤석열 퇴진 영암행동’이라는 연대체가 공식 발족한 것이다. 민주단체협의회, 5.18 부상자회, 자활센터 등 지역 내 30여 개 단체가 참여한 이 조직은 영암지역의 계엄 반대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 지난해 12월 10일 ‘윤석열퇴진 영암행동’ 결성 회의 모습. 민주단체협의회, 5.18 부상자회, 자활센터 등 지역 내 30여 개 단체가 참여한 이 연대체는 계엄 반대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정철 상임대표는 첫 모임에서 장기전을 예고했다. “12월의 추위가 우리 몸을 얼게 할지 몰라도,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열정은 식지 않을 것입니다. 윤석열이 권좌에서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우리의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말에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5·18을 경험한 호남 지역민으로서의 역사적 책임감이 느껴졌다.

영암의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춥고 길었지만, 군민들의 의지는 오히려 더욱 단단해져 갔다. 이들은 11일과 12일, 14일에 걸쳐 연이어 촛불 집회를 열며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다.

▲ 지난해 12월 11일 저녁, 영암군청 앞에 모인 100여 명의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영암의 남태령 대첩 (12.16~12.22)

12월 16일, 영암 농민들은 전국농민회의 ‘전봉준 투쟁단’ 결성에 동참했다. 이 투쟁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농업 4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에 대한 농민들의 강력한 항의였다.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체포 요구와 함께, 농민들의 생존권 보장도 중요한 투쟁 목표였다.

“농민의 삶은 언제나 척박했지만, 이번 정권에서는 특히 더 힘들었습니다. 농산물 가격 폭락에 더해 양곡관리법 개정마저 거부됐어요. 그런데 이제는 계엄까지 선포해 민주주의마저 빼앗으려 하니 더는 참을 수 없었죠” 김봉식 영암군쌀생산자협회장은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남도청에서 시작된 트랙터 행진은 일주일에 걸쳐 진행됐다. 영암에서도 트랙터 2대와 6명의 농민들이 합류했다. “아침에 수원에 모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간단히 라면으로 요기만 하고 출발했죠. 우리는 농민의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 지난해 12월 남태령 대첩에 참여한 영암군농민회 회원들. 트랙터 2대와 6명의 농민들이 전국농민회 ‘전봉준 투쟁단’에 동참했다.

그러나 서울 진입을 앞둔 남태령에서 경찰의 차벽에 가로막혔다. 이 소식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졌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젊은이들, 특히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 협회장은 당시의 감동을 생생히 회상했다. “저녁이 되자 청년들이 ‘지하철이 끊기면 우리는 갈 수 있지만, 그러면 농민분들만 남아 잡혀가실 수 있다’며 밤을 새워 우리를 지켜줬어요. 그 추위 속에서도 말이죠. 도시의 젊은이들과 농촌의 농민들이 이렇게 연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28시간의 공방 끝에 결국 경찰의 차벽이 열렸고, 농민들의 트랙터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까지 진출했다. 이 ‘남태령 대첩’은 계엄 반대 투쟁의 상징적 장면이 되었고, 영암 농민들도 그 역사적 순간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겨울 속 작은 불씨들 (1월)

2025년 새해, 영암의 민주주의 수호 활동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번져나갔다. 1월 6일은 윤석열에 대한 첫 체포영장 만료일. 이날 교보생명 건물 인근에 모인 군민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 지난 1월 6일 영암 교보생명 건물 인근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 구속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체포영장 만료를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체포를 촉구했다.

“오늘까지 영장이 집행되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권혁주 집행위원장은 이날 집회에서 체포영장 집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눈발이 날리는 추위 속에서도 그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한남동에서 투쟁 중인 시민들의 헌신을 상기시키며 의지를 북돋웠다.

체포영장 집행이 실패로 돌아간 후, 영암 주민들은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읍내 로터리와 5일장이 열리는 영암장, 금정장 등에서는 릴레이 1인 시위가 시작됐다. 매서운 한파 속에 ‘윤석열 체포하라’는 피켓을 든 주민들의 모습은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젊은 세대의 자발적 참여도 돋보였다. 영암고 학생들은 집회에 참석해 또래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교보생명 앞 집회에 참석한 정영광, 고광진, 김지우 학생은 “국민들을 힘들게 하는 윤석열은 퇴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소년들의 참여는 영암의 투쟁이 세대를 넘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촛불 아래 모인 군민들은 학생들의 발언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그 순간 영암의 추운 겨울밤은 한층 따뜻해졌다.

▲ 지난 1월 6일 영암 교보생명 건물 인근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체포 구속 촛불집회’에서 영암고등학교 학생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마침내 잡았다 (1.15)

비상계엄령 선포 43일 만인 1월 15일 오전 10시 33분,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마침내 집행됐다. 그동안 여러 차례 영장 집행이 실패로 돌아가며 국민적 실망을 안겼지만, 이날은 달랐다. 공수처와 경찰은 1,000명이 넘는 수사관을 투입해 체포에 성공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암 곳곳에서는 안도와 환희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날 저녁,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교보생명 앞에는 영암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오늘은 기쁘고 좋은 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권혁주 집행위원장의 얼굴에는 지난 한 달여 동안 볼 수 없었던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케이크와 폭죽을 준비해 축하 행사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정철 상임대표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투쟁의 의미를 되새겼다. “윤석열은 관저에 숨어 경호처 직원들을 방패삼아 끝까지 법의 심판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체포 구속 요구 앞에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영암군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함께 이뤄낸 승리입니다”

이날 집회에는 한남동 ‘키세스 투쟁’의 상징인 은박담요가 준비되었다. 권 집행위원장은 참석자들에게 은박담요를 나눠주며 “한남동 대첩을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은박담요를 두른 참가자들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체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 지난 1월 15일, 윤석열 대통령 체포 소식을 듣고 영암 교보생명 앞에 모인 군민들이 한남동 대첩을 상징하는 은박담요를 두르고 있다.

집회 말미에는 폭죽을 터뜨리고 케이크 절단식을 진행하며 승리의 순간을 기념했다. 정운갑 영암군의회 부의장은 “윤석열 정권 들어 농업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등 서민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며 “이번 체포를 시작으로 탄핵 인용까지 이뤄내 진정한 정권교체를 완수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다음번 촛불 집회는 윤석열이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되는 날 열겠습니다!” 권 집행위원장의 말에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날 윤석열 체포는 영암 주민들에게 123일간의 긴 투쟁 가운데 첫 번째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됐다.

▲ 지난 1월 15일 영암 교보생명 앞 집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축하하며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군민들. 비상계엄령 선포 43일 만에 이뤄진 체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환희와 안도의 마음을 나누었다.

기다림의 시간 (2월~3월)

체포 이후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을 기다리는 시간. 의외의 변수도 있었다. 내란죄 형사 재판을 진행하던 법원이 3월 7일, 위법적인 구속 기간 산입을 근거로 윤석열 측 구속취소를 받아들였다. 여기에 더해 검찰은 즉시항고를 통해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볼 수 있었지만, 윤석열 석방을 지휘했다. 그토록 힘들게 체포한 '피의자 윤석열'은 허무하게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럼에도 영암군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상을 이어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작은 실천을 이어갔다.

3월 25일, 윤석열 즉각 파면을 촉구하며 전봉준 투쟁단이 다시 서울로 재진격하는 투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영암읍과 각 5일 장터에서 지속된 꾸준한 1인 시위와 선전전이었다.

한 명, 또 한 명. 이들의 작은 목소리는 모여 큰 울림으로 이어지리라.

▲ 지난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영암읍과 각 5일 장터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진행한 ‘윤석열퇴진 영암행동’ 회원들의 모습.

마지막 123일째, 우리는 승리했다 (4.4)

마침내 그날이 왔다. 4월 4일 오전, 영암군청 앞 광장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11시에 시작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함께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오늘 4월 4일이 파면을 선고하는 날인데 여러 가지 얘기가 많습니다. 4월 4일 사자가 들어가서 니가 죽을 날이다, 멧돼지 잡는 날이다”라는 촛불동지회 김용준 회장의 말에 참석자들이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는 기대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11시 22분, 헌법재판소 문형배 재판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순간 광장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민주주의 만세!” 권혁주 집행위원장의 선창에 맞춰 군민들이 만세삼창을 외쳤다.

“여러분들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는 영암군민들의 123일간의 투쟁을 이렇게 정리했다.

“오늘 윤석열 파면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 의해 선고되었지만, 영암군민을 비롯한 전 국민의 투쟁이 만들어 낸 승리입니다. 오늘 선고로 윤석열은 파면됐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영암의 123일이 남긴 것

계엄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첫날부터 파면 선고의 환희까지, 123일 동안 영암군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트랙터를 몰고, 촛불을 들고, 피켓을 들고, 때로는 은박담요를 두르고.

이 과정에서 농민과 청년, 노인과 학생, 자영업자와 주부가 하나로 모였다. 내란 세력에 맞선 영암의 작은 움직임은 전국으로 퍼져나간 민주주의 수호의 물결 속 하나의 물방울이었다.

이제 영암군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윤석열 퇴진 영암행동의 성명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은 윤석열과 같은 극우 파시즘이 더 이상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노동의 가치가 존경받고, 농민들이 가격 폭락으로 좌절하지 않는 세상. 인륜보다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안전한 나라이어야 합니다”

겨울은 지나갔다. 영암의 들녘에도 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