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암 장천리 선사 주거지 전경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암열린신문은 지난해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의 연구 성과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암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번 기획은, 1,357기에 달하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영산강 유역의 선사문화, 고려·조선시대 도갑사의 역사와 위상, 조선시대 향약 자료의 특징, 일제강점기 영보정 사건의 실체, 해방 이후 영암 지역사회의 변화상까지 아우른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암의 역사적 사실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새롭게 살펴봄으로써, 영암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미래 발전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1,357기의 고인돌이 말하는 영암의 선사시대
② 고려·조선시대 영암 도갑사의 위상
③ 조선시대 향약을 통해 본 영암의 사회상
④ 일제강점기 영보정 사건의 진실
⑤ 해방 이후 영암의 상처와 성장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 영암에는 무려 175개 군락에 1,357기의 고인돌이 분포해있다. 이는 영암군이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을 보유한 지역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들 고인돌의 분포 양상이다. 영암읍과 금정면, 서호면에 현재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데, 이는 영암의 지형이 동남 고(高) 서북 저(低)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노령산맥에서 뻗은 산지와 구릉이 발달한 이 지역들은 당시 사람들이 선호했던 정주 공간이었던 것이다.
영산강이 바다였던 시절,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산강의 모습은 구석기시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영산강 하류에는 해수가 드나들어 내해(內海)를 이루었고, 삼포천과 영암천까지 바닷물이 드나들며 남해만과 덕진만을 형성했다. 이러한 독특한 지형은 다양한 포구와 나루터가 발달하는 배경이 되었다.
구석기 유적은 시종면 일대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도포면, 군서면, 서호면, 삼호읍 일대에도 산재해 있다. 총 18개소의 유적이 모두 구릉지에서 발견되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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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주 당가유적, 촌곡리유적의 발굴 성과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의 구석기 문화는 약 60,000~30,000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구석기인들은 해수면 변동으로 형성된 갯골과 범람원, 구릉지라는 다양한 지형을 활용하며 살았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주로 몸돌, 찍개류, 여러면석기 등이 있고, 주먹도끼, 칼형도끼 등도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에서 자갈돌 석기 전통이 후기구석기시대 늦은 단계까지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영암의 구석기 유적들은 해발 3~25m의 구릉에 분포하고 평균 11m 부근에 조성되어 있다. 나주 동강면 장동리 수문마을의 기원전 2세기대 패총이나 나주 다시면의 하해혼성층 발견은 당시 이 지역이 강과 조수간만의 차이로 바닷물이 넘실거리거나 갯벌이 드러나는 환경이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구석기인들은 단순히 채집과 사냥만이 아니라 하천과 바다자원까지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로는 이곳이 본거지보다는 이동성을 가진 한시적 캠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 유적이 영암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암을 포함한 영산강 유역에서는 신석기 유적이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전체 영산강 유역에서도 단 4곳의 유적만이 확인될 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주 운곡동과 광주 노대동에서 발견된 야외노지와 수혈, 집석유구 등에서는 봉계리식토기나 이중구연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모두 신석기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다. 결국 영산강 유역에서는 신석기시대 후반기의 자료만이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을까
전문가들은 이를 서남해안지역의 독특한 문화변동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서남해안지역은 신석기시대 조기·전기부터 남해안지역과 동일문화권을 형성할 만큼 문화와 정보 교류가 활발했다. 그러나 중기 이후 상황이 달라진다.
남해안지역은 초기농경이 파급되면서 패총 문화가 감소하고 내륙지향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서남해안지역과의 교류가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기후환경의 변화까지 더해져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호남지역의 인구가 다른 지역으로 이탈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말기에 이르러서는 호남지역의 유적 수가 다소 증가하지만, 대부분이 패총 유적이다. 이는 한반도 전역에서 나타나는 이동성 증가 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결국 영암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당시 남해안을 둘러싼 신석기시대인들의 내외적 사정과 선택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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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영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인구 공백기였던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영암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발굴된 유적만 보더라도 생활유적 8개소, 지석묘 175개군 1,357기가 확인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유적의 시기와 분포 양상이다.
영암의 청동기시대 유적들은 대체로 중기 이후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장천리유적과 금계리유적에서 발견된 주거지들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송국리형 주거지이며, 월송리유적에서는 삼각형 석도가 출토되었다. 이는 모두 청동기시대 중기 송국리문화 단계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 ▲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에 있는 선사주거지와 고인돌군 유적. 전라남도 기념물 제98호.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특히 장천리유적 지석묘에서는 세형동검편과 검파두식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2세기경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면에 빗질 흔적이 있는 경질무문토기의 출토는 이 지역에서 도작농경문화가 확산·정착되었음을 시사한다.
지석묘의 분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영암의 지석묘는 규모에 따라 10기 이하의 소형군집, 11~25기의 중소형군집, 26~40기의 중대형군집, 41기 이상의 대형군집으로 구분된다.
대부분 소형 및 중소형 군집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영암읍, 금정면, 시종면과 지형적으로 연결되는 신북면에서만 중대형 혹은 대형군집이 확인된다. 서호면·학산면·미암면 일대에서는 중대형 군집 이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지석묘군과 지석묘 수가 많다는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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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암은 마한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까
청동기시대의 강력한 문화적 기반은 자연스럽게 마한 사회로 이어진다. 주목할 점은 신북면과 영암읍 일대의 지석묘 대형 군집지역이 이후 마한 고분군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영암군 시종면 일대와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 미암면·서호면·학산면 일대에서 확인되는 대형옹관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요한 정치체로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특히 시종면 일대와 동일문화권에 해당하는 나주 반남면은 다양한 분형과 대형고분이 밀집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에 반해 월출산 이남의 남부지역은 서호면을 중심으로 금계리, 선황리유적과 같은 초기 대형옹관이 주로 분포한다. 이는 지역별로 서로 다른 문화적 특색을 가진 정치체들이 성장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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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한 사회의 발전은 백제가 이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는 배경이 된다. 백제는 영암 일대에 다음과 같은 행정구역을 설치했다:
- 월나군(月奈郡): 영암읍 일대
- 고미현(古彌縣): 미암면·학산면 일대
- 아로곡현(阿老谷縣): 금정면과 나주시 세지면 일대
-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시종면과 나주시 반남면 일대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행정구역이 청동기시대 지석묘 밀집지역, 마한시대 고분 분포지역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지역의 중심성이 마한을 거쳐 백제시대까지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암에 남아있는 1,357기의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청동기시대부터 마한, 백제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이 호남 서남부의 중요한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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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지난 2024년 11월 21일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에서 개최된 ‘영암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천선행(조선대학교) 교수의 ‘영암지역 선사문화의 분포와 전개’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