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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민간인 희생사건(5) #12
  • 입력 : 2026. 10.02(금) 10:34
  • 이민정 기자

위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진실규명대상자 이○용(2다-2417-14, 신청인 이○철)

진실규명대상자 이○용(李○用, 족보명 이○범, 남, 1915년생, 농사)은 1950. 12. 13.(음력 11. 5.) 덕진면 운암리 대천동마을 뒷산 쇠금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이○철(1942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용은 덕진면 운암리 400번지 대천동마을에서 부인, 자녀 2명과 함께 거주하였다.

1950. 12. 13.(음력 11. 5.) 해가 뜨기 전 새벽, 이○용은 가족들을 데리고 대천동마을 뒷산 쇠금재로 피난을 갔다. 쇠금재를 넘어가면 금정면인데, 당시 덕진면 주민들은 쇠금재를 넘어 금정면으로 피난을 가곤 했다. 이○용이 앞서가고 그 뒤를 부인과 아들 이○철(신청인), 딸이 뒤따라가던 중, 쇠금재 꼭대기 쪽에서 총소리가 2번 났다. 이○용의 부인과 자녀들이 그 총소리를 들었고, 약 5분 후에 쇠금재 꼭대기에 도착했더니 이○용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용의 부인은 자녀들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이○용의 형과 마을주민들이 이○용의 시신을 수습하여 근처에 매장하였고, 나중에 이씨 문중 산으로 이장하였다.

신청인은 아버지 이○용이 누구에게 총을 맞은 것인지 몰랐다가 나중에 그날 경찰이 쇠금재에 잠복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삿날은 희생 전날인 음력 11. 4.이다.

참고인 이○○(1938년생, 조카)의 진술에 따르면, 이○용이 희생된 날 새벽, 경찰이 덕진면 운암리 대천동마을 뒷산을 여운재부터 쇠금재까지 포위했고, 날이 밝자 경찰 일부가 마을에 내려와 집집마다 다녔다. 그날, 참고인의 집에도 경찰 2명이 와서 방문을 모두 열어봤고, 집에 참고인의 할머니와 어머니, 참고인만 있는 것을 보고는 나갔다. 참고인의 형 등 다른 가족들은 그전에 피난을 나가 있었다. 그날 저녁, 이○용의 부인이 마을에 내려와서 이○용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다음 날 아침, 가족들과 마을주민들이 쇠금재에 있는 이○용의 시신을 수습하여 부근에 매장하였다.

1~2년 후 운암리 뒷산 이씨 집안 산으로 이장하였다.1)

이○용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51. 5. 7. 본적지에서 사망(1961. 10. 10. 신고)’으로, 족보에는 ‘1950년 경인(庚寅) 11월 5일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2)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이○용의 시신이 덕진면 운암리 대천동마을 뒷산 쇠금재에서 가족들에 의해 수습된 점, (2) 신청인이 아버지 이○용과 함께 피난을 가다가 총소리를 들었고 이후 이○용의 시신을 목격한 점, (3) 사건 당일 마을 뒷산을 경찰이 포위한 것과 경찰이 마을로 내려와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한 참고인 이○○의 진술이 구체적인 점, (4) 이○용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11. 4.이고, 족보에 기재된 이○용의 사망일이 1950. 11. 5.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이○용은 가족들과 피난을 가다가 1950. 12. 13.(음력 11. 5.) 덕진면 운암리 대천동마을 뒷산 쇠금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 희생 사건

덕진면 운암리 송석정마을 주민, 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 주민이 경찰에 의해 덕진지서로 끌려가 감금되었다가 1950. 12. 21.(음력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자는 신○섭, 신○교, 신○수 등 3명이다.3)


진실규명대상자 신○섭(2다-1129-39, 신청인 신○팔)

진실규명대상자 신○섭(申○燮, 족보명 신○우, 남, 1916년생, 농사)은 1950. 12. 21.(음력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신청인 신○팔(1950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신○섭은 덕진면 운암리 172번지 송석정마을에서 어머니, 부인, 자녀들과 거주하였다.

신○섭은 같은 마을에 살던 신○교와 함께 피신하러 가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덕진지서로 끌려갔다. 신○섭과 신○교는 덕진지서에 1주일 정도 갇혀 있다가 1950. 12. 21.(음력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 부근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소식을 들은 친척 신○○ 등이 신○섭의 시신을 수습하여 근처에 매장하였다. 나중에 덕진면 운암리 대천동마을에 있는 선산으로 이장하였다. 제삿날은 음력 11. 12.이다.

참고인 신○백(1947년생, 이웃)의 진술에 따르면, 참고인의 아버지 신○교는 송석정마을 이장이었는데, 밤이면 빨치산이 신○교의 집에 찾아와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신○교는 밤마다 찾아오는 빨치산을 피하기 위해 옆집에 살던 신○섭과 함께 마을 뒷산으로 가다가, 신○교와 신○섭을 빨치산으로 오해한 경찰에게 붙잡혀 덕진지서로 끌려갔다. 신○교와 신○섭은 덕진지서에 감금되었다가 덕진면에서 신북면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한새다리로 끌려가 총살되었다.4)

신청서와 함께 제출된 사실확인서(증언자 신○○, 1934년생, 신○섭의 조카, 고인)에 따르면, 신○○은 아버지, 마을주민과 함께 한새다리에 가서 신○섭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그곳에 신○교, 영보마을 주민, 송외마을 주민 등 10여 명의 시신이 있었다.5)

신○섭의 사망일이 제적등본에는 ‘1949. 12. 8. 본적지에서 사망(1952. 6. 18. 신고)’으로, 족보에는 ‘1950. 11. 13. 졸(卒)’로 기재되어 있다.6)

2007년 피해자현황조사에 ‘신○섭, 남, 34, 덕진면 운암리, 1950. 12. 20., 총살, 경찰’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 진실규명대상자 신○섭의 시신이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친척들에 의해 수습된 점, (2) 신○섭의 제삿날이 희생 전날인 음력 11. 12.인 점, (3) 족보에 기재된 신○섭의 사망일이 1950. 11. 13.이고, 신○섭과 함께 희생된 신○교의 족보상 사망일도 같은 날짜인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신○섭은 1950. 12. 21.(음력 11. 13.) 신북면 장산리 한새다리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다음에 계속


1) 참고인 이○○ 진술조서(2022. 3. 31.) 이○○은 이○용의 형의 아들로, 주민등록상 1939년생이나 실제로는 1938년생이다.
2) 『함평이씨현령공파보(咸平李氏縣令公派譜)』, 1980.
3) 한새다리는 덕진면과 신북면 경계 부근을 일컫는 지명이다.
4) 신청인 신○백 진술조서(2021. 11. 9.) 신○백은 2다-2124-47 사건의 신청인이다.
5) 진술인 신○○의 사실확인서는 2017. 10. 4. 법무법인 광주로펌에서 작성되었다. 신○○은 2018. 6. 20. 영암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6) 「영산·영성신씨대동보(靈山·寧城申氏大同譜)」5권, 2002, 361쪽.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