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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민간인 학살 희생에 관한 자세한 얘기들을 좀체 찾아볼 수 없었다. 영암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결정문 안에 제법 세세한 당시 상황들이 기록돼 있었다. 보도자료로 어림짐작한 것보다 훨씬 참혹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됐다. 적어도 결정문에 담긴 내용만큼은 전부 게재할 요량이다. 연재 내용은 결정문에서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학산지서 사건
용산리 신소마을 최봉호 4형제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 서울에 거주하였다. 장남 최봉호(당시 28세)는 소방서장이었고, 차남 최행호(당시 26세)는 방직회사에 다녔다. 셋째 최재화(당시 23세)는 철공소에 근무하고 있었고, 넷째 최익호(당시 14세)는 학생이었다. 4형제는 전쟁이 나자 고향에 와 있었다.
학산지서는 1950년 11월 14일1)에 수복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무렵 주민 대부분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의 시달림을 피해 피난을 다녔다. 1950년 11월 15일 최봉호 4형제와 신창순(30대 이상)은 신창순의 집 근방 갈대밭에 피신하여 있던 중 영암면 쪽에서 들어온 경찰 10여 명에게 발각되었다. 경찰이 신청인 최익호(당시 14세)에게 “너는 어리니 가라” 해서 최익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경찰은 최익호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을 학산지서로 끌고 갔다. 경찰은 도중에 서호면 몽해마을 주민 5명도 연행했다.
다음날인 11월 16일 오전 빨치산의 지서 습격사건이 발생하였고 교전 중 김준병 경위가 전사하였다.2)
경찰은 11월 16일, 전날 학산지서에 구금했던 9명 중 최봉호·최재화 형제, 신창순, 몽해마을 주민 4명 등 7명을 학산지서 부근 골짜기에서 사살하였다. 경찰은 이들이 지서 습격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3) 둘째 최행호도 현장으로 끌려갔으나 총알이 목 부분을 빗겨나가 살아남았다. 나머지 몽해마을 주민 1명도 현장으로 끌려갔다가 살았는데 이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영암경찰서로 불려갔고 최행호는 풀려났으나 서호면 몽해마을 주민은 사살되었다.
최봉호·최재화 형제의 시신은 희생자의 아버지 등 가족에 의해서 수습되었다. 신창순과 몽해마을 주민의 구체적인 신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용산리 주민 희생사건
학산지서는 11월 중순경 수복되었으나 월출산 자락인 상월리 유천동에서는 11월 하순까지도 경찰의 토벌작전이 있었다. 「한국경찰대 일일 적 동향보고서」에는 ‘1950년 11월 29일 해남경찰과 영암경찰이 학산면 상월리 부근에서 소탕작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4)
용산리 일부 주민들은 경찰 토벌을 피해 산과 더 가까운 상월리 유천동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4일 새벽 경찰이 마을에 총을 쏘며 들어오자 김영현·박탑동 부부는 60이 넘은 노인들이라 멀리 가지 못하고 집과 가까운 상월리 유천동으로 피신하였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사살되었다.5)
김영현·박탑동 부부의 딸인 김달심(당시 27세)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의 시신은 유천동 대밭에서 수습되었고 제사일은 음력 10월 14일(양력 11월 23일)이다.
한편 김영현과 같이 상월리로 피신했던 용산리 주민 참고인 김종노(당시 19세·김영현의 6촌조카)는 “어머니(장정심)는 막둥이를 업고 피난 나가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내내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용산리 주민 박사술도 그날 유천동 골목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사망자 박사술의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음에 계속
1) 영암경찰서, 「퇴직자 이력서 철」에 기재된 경찰(김일삼·조명규·홍기표 등) 임용일을 통해 학산면은 1950.11.14.에 수복된 것으로 추정된다.
2) 동아일보, 1950년11월22일자, “김준병 경위 독천작전서 전사: 지난 16일 상오 10시 전남 영암군내 독천에 수십 명의 무장공비가 내습 …(중략)… 이를 격퇴하였다. 영암경찰서 보안주임 김준병은 애석하게도 흉탄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한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7.24.). “이런 경우(김준병 전사)에는 부화가 나니까 일반인을 구별해서 조치하기보다는 한꺼번에 처리할 수도 있다.”
3) 신청인 최익호 진술조서(2008.3.11.). “하룻밤을 재우는데 지서 습격이 들어오는 바람에 경찰이 형들을 취조하지도 않고 그날 잡혀온 사람 중 두목이 있어 이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습격이라고 오인하고 잡아간 사람들을 지서에서 3km 떨어진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사살하였다.”
4) 「한국경찰대 일일 적 동향보고서」. “1950.11.29. 오전 10시 해남경찰서 1개 소대와 영암 2개 이상의 소대가 학산면 상월리 부근에서 소탕작전을 벌여 적 30명을 죽이고 소 1마리와 상당한 양의 전리품을 노획하였다.”(1950년 12월 3일자 보고).
5) 참고인 김종노 진술조서(2008.6.26.). “경찰이 진주할 무렵 용산리 엄부락 사람들은 옆 부락(유천동)으로 피신 가서 잠을 잤다. 1950년 11월 24일 새벽 4∼5시에 경찰이 총을 쏘며 마을을 포위했다. 나처럼 젊고 발 빠른 사람들은 피해를 덜 받았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김영현·박탑동 두 분(6촌 조부모)도 노인이었는데 신우대밭에 숨었다가 경찰에게 발견되어 사살되었다.”; 참고인 ○○○ 진술조서(2008.7.24.). “유천동은 월출산 줄기 밑에 대밭이 있는 마을이다. 대밭은 총알이 미끄러지니까 주민들이 그리로 피신을 많이 한다. 수복이 되려고 할 때이니까 민간인이 많이 죽었다.”
이민정 기자 opennews@ope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