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수치심 몰라도 상관없는 이야기 선호성 기자 opennews@openmedia.co.kr

2022년 01월 28일(금) 15:04

마사 너스바움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인가? SNS나 각종 커뮤니티는 물론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혐오의 단어들이 배설되고 그에 기반한 무차별적인 묻지마식 폭력들이 자행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혐오, 그 이전의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인종, 계층에 대한 혐오, 심지어 지역과 세대 간의 혐오까지. 이러한 혐오들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병든 민낯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화상 같아서인지 서글프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이자 법철학자, 윤리학자 그리고 여성학자이기도 한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책을 통해 그간의 혐오와 수치심에 관한 얘기를 한다. 그리고 함께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할지 또 어떤 가치를 가져가야 할지에 관한 얘기를 풀어가고 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을 꼼꼼히 얘기하기에는 지면의 제약도 따르고 저자의 철학을 깊이 있게 파악하기엔 필자의 능력이 턱없이 모자라 부끄러움도 앞선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가늠해보고자 개략적으로 이를 살펴보는 바이다.

잠깐 잡설을 덧붙이자면 이 책은 흔히들 페미니즘에서 거론되는 필독서라고들 하는데, 필자는 이 책을 불명확하고 가치판단적인 법률 규정들에 대한 문제점을 사회 정의 측면에서 비판하는 법학적 학술서로 발췌하며 접한 까닭에 접근에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최근 이 책 덕분에 극단적으로 왜곡된 페미니즘 쪽에서 제기하는 제 문제들에 대해 오히려 비판의 논거로 활용하기 좋은 자료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얘기는 후일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하기로 한다.


공적 판단의 근거가 돼버린 집단의 감정(affact)

혐오나 수치심은 분명 감정의 영역이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도 하나의 신념의 집합체로써 사실상 어떤 공적 판단의 기준이 되어 우리 사회에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혐오와 수치심만은 모든 공적 판단의 근거로써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 주장이다.

저자는 혐오와 수치심이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수반하고 있기에 이는 타인을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약자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는 강자들만의 부당한 논리로 확대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먼저 혐오와 수치심에서 인용하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의 한 구절을 보자면,

“어떤 형식이든 특히 문화생활의 형식에서 불결하거나 파렴치한 일이 일어났다면 적어도 거기에 유대인이 관련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종기를 조심스레 절개하자마자 사람들은 썩어가는 시체 속의 구더기처럼 돌연히 비친 빛에 눈이 부신 듯이 끔뻑거리고 있는 유대인들을 종종 발견했다.”

아돌프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이 나치 체제가 유대인에 대한 혐오 그리고 장애인에 대한 혐오, 유색 인종에 대한 혐오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우리는 역사를 무시무시한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사유의 기초에 ‘혐오’라는 감정이 대대적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히틀러가 바라봤던 그 유대인을 만약에 요즘 우리가 SNS나 커뮤니티에서 접하게 되는 혐오의 대상에 대입해 본다면 이를 공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보인다. 특히 여성을 둘러싼 혐오가 오랫동안 인류의 남성 지배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자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그 혐오에 대해서 또 다시 혐오로 맞선다는 것, 가령 이전의 여혐에 맞서 똑같은 방식의 남혐으로 이를 대치시키는 것 역시 대상 간의 갈등만을 촉발시킬 뿐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런 혐오가 지배하는 사회, 혐오가 우리의 심성을 통제하는 사회는 그야말로 방향성을 상실한 사회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혐오가 지배적일 때 그 사회는 특정집단에 의해서 아주 왜곡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역사 속에서 혐오는 특정 집단과 사람들을 배척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써 이용돼왔다.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과 같은 계급의 사람들은 혐오의 대상이 돼온 대표적인 예다. 이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오물로 치부하며 자신들의 완벽함을 증명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력적인 국면들이 나타났다.

저자는 책에서 그야말로 서사적 상상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우리 인류가 혐오에 의해서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지나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예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는데 이러한 혐오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이 책에서 인용하는 대표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면,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순수함과 오염이라는 사고를 수사적으로 사용하면서 이슬람교도들을 자신들 민족의 육체를 더럽히는 외부자로 묘사했다. 순수함에 대한 이들의 이러한 사고는 일관되게 육체적 관념에만 머물렀는데, 이를테면 이슬람교도 남성과 여성은 그들이 지닌 신체 번식력 때문에 순수한 힌두교도 남성의 통제력을 위협하는 성욕 과잉의 동물적 존재로 그려졌다. 폭동 중에 배포된 선전물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이러한 성적 이미지만을 퍼트렸으며 불이나 금속물로 이슬람교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 부위를 유린함으로써 그들의 육체를 보복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이러한 고문들은 특히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자행됐는데 집단으로 여성을 강간하며 커다란 금속물을 질 속에 집어넣기도 하고 산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이는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이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폭력을 선동하기 위해서 혐오를 어떻게 악용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본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책 안에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

수치심에 관한 사례들도 많다. 소위 낙인찍기라는 수치심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면,

“실직자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수치스러운 일인지 아는가 외출할 때 나는 완전 열등감에 사로잡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다닌다. 길을 걸을 때 나는 스스로 보통 사람들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며 모든 사람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본능적으로 사람만나길 기피한다.” 이는 어빙 고프먼의 ‘스티그마’에서 재인용한 구절이다.

이처럼 혐오와 수치심은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지점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악용될 경우 폭력적인 학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저자 마사 너스바움의 얘기다.

이런 혐오와 수치심이 힘을 띄면서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유는 각각의 인간들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우리가 모두 불완전하고 취약한 인간인 점을 인정한다면 이 혐오와 수치심으로 빠져들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특히 이 책의 역자인 조계원 선생은 이 부분에 대해 이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왜 혐오와 수치심을 넘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가. 마사 너스바움은 이 답을 우리 모두가 너무 불완전하고 취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찾는다.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너무나 약하고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누구나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취약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한 품위 있는 사회란 이러한 인간성을 부정하지 않고 개인이 지닌 역량이 발현될 수 있도록 촉진적 환경을 제공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저자의 가치와 철학이 응집돼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 또한 불확실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컨대 장애인의 경우 우리가 비장애인이라고 또는 정상이라고 얘기하면서 장애인을 혐오하고 비하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불확실한 조건 속에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을 비하하고 혐오하거나, 또는 수치심을 안겨줬다면,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 그 처지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모두 유한하며 나약하고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이 혐오와 수치심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완벽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런 유한성이나 불확실성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와 수치의 언어들을 남발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혐오가 아닌 ‘분노’를, 수치심이 아닌 ‘죄책감’을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에 제안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보자면, 우리 사회가 공격성이 아주 강하다는 지적에 대해 분노와 혐오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는 정당하지 않은 사회적 구조, 부당함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원이라면 혐오는 누구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아주 저열한 태도라고 한다.

또 수치심 역시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치려는 의도가 깔린 처벌이라고 지적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처벌은 ‘당신은 나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표명하지만,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당신은 결함을 지닌 사람입니다’라고 표명한다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나 죄에 대한 책임을 따지는 죄책감이 아닌 주로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이나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 대한 멸시와 조롱 그리고 폭력의 형태로 드러내는 공격성이야말로 이러한 혐오와 수치심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혐오와 수치심을 근간으로 공격성을 띠는 우리 사회를 우리가 좀 더 다른 방향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약성 그리고 한계성,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과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이나 경쟁 자체를 할 수 없는 사람도 적절한 삶의 기회를 얻고 존중받는 사회, 가난·장애·성적 취향 때문에 수치심을 겪지 않는 사회에서만이 개인이 지닌 공격성, 혐오와 수치심의 언어들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좌절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때 혐오와 수치심을 유발하는 여러 말과 글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취약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분노하되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를 경계한다는 뜻이라는 역자 조계원 선생의 말도 덧붙여본다.

책 말미엔 김영란 선생의 책에 대한 추천사가 달려 있다. 그 일부를 살피며 갈무리한다.

“혐오와 수치심은 분노나 두려움과는 다르다. 혐오는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고 혐오의 대상은 오염물질로 여겨지므로 사라져버리길 원하는 것이 된다. 오염을 일으킨 존재의 제거라는 도취된 환상 속에서 공격성과 혐오가 드러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하층계급 사람들이 모두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혐오를 근거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또 이처럼 혐오는 경계를 만들어 내므로 악한 사람들을 혐오스럽다고 보면서 손쉽게 우리 자신과 그들을 분리시킬 수 있다. 나치즘을 우리의 현재와는 전혀 닮지 않은 혐오스러운 괴물들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악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수 없고 우리 사회에 비슷한 현상이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