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사에서 문산재까지 영암열린신문 opennews@openmedia.co.kr

2021년 12월 10일(금) 16:59

전동호 전라남도 前건설교통국장

12월의 첫날을 월출산에서 시작했다. 7월부터 매월 1일은 그렇게 하자던 스스로의 약속을 지켰다. 천황사 주차장을 지난다. 한여름 녹엽이 초겨울 낙엽이 되고 더 캄캄해진 하늘이라는 것뿐, 달라진 게 없다. 빨간 등을 단 기계음의 안내를 받으며 차단봉을 지난다. 5시 12분이다. 도갑사로 내려가 문산재까지 오를 참이다.

지난달 마지막 비를 동반한 바람소리가 여전히 사납다. 하지만 숲속 길은 조용하고 포근하기까지 하다. 작은 불빛을 따라간다. 계곡을 타는 물소리가 더 오르며 만상의 바람을 담은 바람폭포에 도착했다. 귓잔등의 땀방울도 흘러내린다. 잠시 쉬어가라는 뜻이다. 5시 45분이다. 육형제바위를 보러가는 가파름이 시작된다.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막힘없는 전망대로 향하게 한다.

6시 8분이다. 아직도 캄캄한 밤이다. 싸라기눈이 소문도 없이 흔적을 남기고 갔다. 얼마 아니면 하늘 길로 통하는 통천문이다. 쉽게 허락하지 않게 다는 듯이 완전히 바람골이 되어있다. 포효 소리를 해대며 고드름까지 달았다. 그 안을 빠져나오니 6시 42분이다. 잠시 내리막에 이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른다.

드디어 천황봉, 6시 50분이다. 아무도 없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영수회담을 시작하며 비온 후 첫 일출을 기대했건만 여전히 구름 안이다. 그렇지만 손이 시려서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 내려가야 한다. 간간히 얼음이 된 바닥과 눈발이 쌓인 낙엽이 미끄럽다.

돼지바위 너머로 붉은 해가 비추기 시작한다. 저기가 큰바위얼굴이다. 이리저리 돌려봐도 잘 찍히지는 않는다. 사진은 초점, 노출, 구도가 잘 맞아야 하는데 석양빛이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잠시 구정봉으로 향한다. 바위를 오르내리며 굴까지 통과하니 8시 5분이다. 정상은 서있기조차 힘들게 바람이 다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버텨냈다. 우리의 소원이 담긴 큰 우물이 저 앞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사랑의 열매도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억새밭 사이로 난 천상의 계단을 내려서 얼마나 왔을까? 대팻집나무, 말오줌때와 굴피나무 푯말까지 지난다. 물소리, 바람소리,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도선교를 건너니 상견성암으로 가는 비밀의 문이다. ‘자기 쓰레기는 되가져갑시다.’ 플래카드도 보인다.

도선수미비가 웅장하다. 통일신라 선승 도선국사와 조선시대 수미왕사를 추모하는 비다. 1636년(인조 14)에 승려 옥습(玉習)이 발원하여, 18년에 걸쳐 1653년(효종 4) 완성했다. 그 시절에 이런 규모가 오늘날 보물 1395호가 되었다. 요즘 현대건축물은 어떤가? 미래세대의 문화재 감이 없다. 생각을 실천하는 기술, 조화와 배려, 경제성의 가치를 잘 따져서 너무 편중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용수폭포를 건너 도갑사다. 인생의 길(道)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첫 번째(甲) 도량이다. 그 중심에 돌탑이 있다. 나무를 다루듯이 분배, 절제와 곡선의 미까지 일품이다. 천불전과 대웅전을 지나 정토세계로 들어가는 해탈문을 나서니, 다시 번뇌세상이다.

‘차를 부를까요?’ 아니, 오늘은 끝까지 걸어보게. 보라빛깔 열매를 뒤로 죽정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눌타리 앞 구림천을 건너 주지봉으로 향한다. 옛 사람들도 오르내렸던 그 길에 고인돌 같은 큰 바위가 서있다. 지침바위(紙砧岩)라 불린다. 닥나무를 찌어 종이를 만들던 곳으로 8m 높이에 둘레가 25m나 된다.

조금 더 오르니 축대 위에 문산재(文山齋)와 양사재(養士齋)가 앉아있다. 백제 왕인(王仁)이 공부했다는 터에 구림 대동계(大同契)에서 1688년(숙종 14)에 서당을 열며 문산재라 이름 지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기를 원하며 양사재를 추가했다. 그런데 지금은 겉모습뿐이다. 닫힌 문을 다시 열어서, 원하는 이들에게 대여하거나 일박이일 체험상품이 되게 하면 좋겠다.

그 아래 물받이 절구통이 예술이다. 그런데 안내판은 지난 시간을 탓하는지 희미해져간다. 없애던지, 다시 하던지 그래야겠다. 왕인석상과 책굴도 있다. 50m만 더 기면 된다. 석상 높이는 2.57m, 책굴은 바닥 면적이 7×2.5m나 될 만큼 넓다. 그 앞, 소나무 아래 바위에는 사각형 홈이 파여 있다. 무슨 흔적일까?

점심은 ‘달지붕 까페’ 매점에 주문한 토종닭 백숙이다. ‘우리 누나가 닭을 잘 삶아요.’ 재주 많기로 일등인 동생이 자랑하던 그 맛이다. 수요일은 쉬는 날인 까페도 열게 했다. 커피 한 잔의 추억을 담아가기 위해서다. 5시부터 12시까지 산행과 2시간여 점심시간이 만든 한나절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간다.

예부터 영암은 월출산과 영산내해를 기반으로 한 풍요로운 설화가 넘쳐났던 곳이다. 왕인, 최지몽, 최승우, 도선, 의병과 의인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많은 전설 또한 깃들어 있다. 이들을 잘 묶어내서 산 넘어 금릉 경포대까지 하나가 되게 풀어간다면? 달빛과 햇살이 함께하는 멋진 산사체험 상품도 될 만하다.

그 시작은 브랜드 개발이다. 12월의 첫날 ‘천황사에서 문산재까지’ 월출산 이야기를 ‘용흥에서 죽정, 월출에서 일출, 월하가도’같이 재포장해보는 일이다. 명품, 명작으로 가는 길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 우리 모두가 함께하면 더 빨라진다는 사실이다. 거기 누구 없소? 바로 오늘부터 해보자.

[약력]
영암군 서호면출신
광양청 개발부장
전남개발공사 개발본부장
여수시 건설교통국장
전라남도 이사관 명예퇴직